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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남편이 동성애자였네요”···한 남자의 성적취향이 불러온 나비효과 [사색(史色)]

“결혼한 남편이 동성애자였네요”···한 남자의 성적취향이 불러온 나비효과 [사색(史色)]

[사색-57] “그들이 우리의 삶을 앗아갈지는 몰라도, 결코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순 없을 것이다(They may take our lives but they will never take our freedom).}”

적이 목에 칼을 들이댄 상황에서도,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목숨보다 중요한 건 민족의 자긍심이라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끝나더라도 자긍심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개가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사형장에서 그가 외친 마지막 메시지인 “Freedom”(자유)의 가치는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우리 스코틀랜드인에게 굴종은 없다.”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 스코틀랜드 독립운동가 윌리엄 월리스 역할을 맡은 배우 멜 깁슨. [사진출처=IMDB]
20세기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 중 하나입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인 윌리엄 월리스(멜 깁슨)가 잉글랜드에 붙잡혀 처형당하기 직전 외친 울림이었지요.스코틀랜드 독립운동가인 그는 결국 잉글랜드의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 영화 하나로 세계 수많은 사람이 스코틀랜드에 공감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유난히 많은 외침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멜 깁슨이 연기한 윌리엄 월리스는 실존 인물입니다.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침입한 1300년대 독립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프리덤’이라는 대사는 영화적 각색이었지만, 그의 죽음이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묶은 구심점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윌리엄 월리스는 죽음으로써 스코틀랜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망치’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적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도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사라지면서 독립운동의 불씨도 다시 살아납니다. 잉글랜드의 새 군주 에드워드 2세가 암군 중 암군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어쩐지 남자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에드워드 2세의 부인 이사벨라 역할을 맡은 소피마르소. [사진출처=IMDB]
잉글랜드의 새 군주 ‘에드워드 2세’는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군주였습니다. 그의 동성 애인은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렀지요. 스코틀랜드에는 다른 영웅들이 나타나 나라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군주의 성적 취향이 부른 ‘나비효과’인 셈이지요.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사에 얽힌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계승문제 불거진 스코틀랜드, 미소짓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새 왕은 누구인가”

스코틀랜드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1286년 봄이었습니다. 국왕 알렉산더 3세가 말에서 떨어져서 사망합니다. 후계자는 어린 손녀 마가렛 뿐. 그녀마저도 이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나라의 기틀이 완전히 닦이지 않은 상태에서 후계 문제가 불거집니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스코틀랜드 국왕 알렉산더 3세의 대관식.
귀족들은 왕위 계승의 야욕을 드러냈고, 나라는 분열했습니다. 사법 기관에 의해 귀족 존 발리올이 군주의 자리를 인정받았지만 ‘내전’을 막기 위한 임시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국경을 맞댄 잉글랜드는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이웃나라의 불운은 자국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명군 중의 명군. 탁월한 군사전략가였던 그는 ‘브리튼섬’ 통일을 위한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지요.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점령한 뒤 세운 첫 성 ‘카나번’. [사진출처=Albertitvan]
서쪽 웨일스에 대한 정복을 완성한 것도 그였습니다. 정복이 끝나자 아들 에드워드 2세를 ‘웨일스의 왕자’(Prince of Wales)로 임명하지요.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한 나라”라는 공식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모든 왕세자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불렸지요.현재 찰스 3세의 아들 윌리엄 왕세자의 공식 직함 역시 ‘웨일스의 왕자’입니다.

군사천재 에드워드 1세, 브리튼섬 통일에 나서다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복속시키게.”

에드워드 1세의 눈은 북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거칠고 강한 사내들이 모인 스코틀랜드를 잡아야 유럽의 강자로 설 수 있었습니다. 마침 스코틀랜드는 분열의 늪에 빠진 시기.

에드워드는 채찍과 당근을 함께 꺼내 듭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귀족작위와 평화를 약속하고, 반항하는 자에겐 무력을 행사합니다. 리더로 임명된 존 발리올마저도 에드워드 1세를 군주로 모신다는 ’오마주‘를 바쳤지요. 스코틀랜드의 굴욕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를 잡아야 유럽대륙으로 진출이 용이하다” ‘스코틀랜드의 망치’로 불린 에드워드 1세의 초상화.
모든 사내가 굴종의 길을 따른 건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귀족들이 있었지요.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가 잉글랜드의 오랜 숙적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것이었지요. ’적의 적은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올드 동맹(Auld Alliance)’의 시작이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참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는 건 잉글랜드에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지요. 이제군사적 정벌을 시작합니다. 1296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은 참패를 당했지요.1800명의 귀족이 전쟁에서 패한 뒤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때부터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망치’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빼앗은 성물 ‘스콘의 돌’은 지금도 영국 왕 대관식에 사용된다. 찰스 3세 대관식 때 옮겨지는 스콘의 돌. [사진출처=UK Government Scotland]
모두가 독립을 포기한 시기...영웅이 나타나다
“잉글랜드에 백기를 들을 수 없네.”

위기의 시기가 찾아와서야 애국자와 매국노가 가려지기 마련입니다. 멸국의 위기에서도 조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하급 귀족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류 드 모레이였습니다.

앤드류는 던바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로 잡혔지만 결코 포기를 몰랐습니다. 탈옥에 성공해 게릴라전으로 독립의 불씨를 이어갔지요. 윌리엄 역시 잉글랜드 관리를 암살하는 전략으로 식민지 시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전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독립의 의지를포기하지 않은 윌리엄 월리스. 에든버러에 조각된 석상. [사진출처=Kim Traynor]
에드워드 1세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스코틀랜드라는 ‘다 잡은 토끼’를 놓아 줄 순 없었던 것이지요.군사 행동을 강행합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연결하는 스털링 다리로 군사를 파견했지요. 다리 건너편 스코틀랜드의 땅에는 영웅 두 사람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류 드 모레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모이니 지혜는 배가 됐습니다. 기병 중심인 잉글랜드 군을 스털링 다리 인근 습지로 유인합니다. 질퍽한 땅에서 기병은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늪에 발이 묶인 사이 스코틀랜드 군이 나타났지요. 도륙의 시작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군이 처음으로 잉글랜드를 상대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둡니다. 이제 윌리엄 월리스는 명실공 ‘스코틀랜드의 수호자’였습니다.

“우리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게 졌다고?” 영화 ‘브레이브 하트’ 속 에드워드 1세. [사진출처=IMDB]
내부의 적에 당한 윌리엄 월리스
큰 승리였지만 상황은 스코틀랜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1세가 직접 군사행동을 몇 차례 감행한 데다가, 동맹 프랑스 역시 내분으로 스코틀랜드를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에드워드 1세에 충성하는 스코틀랜드 귀족이 많았다는 것도 불안 요소였지요.

1305년 8월의 일이었습니다. 잉글랜드에 충성하는 스코틀랜드 기사 존 드 멘티스가 글래스고에 매복해 있다가 윌리엄 월리스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는 즉시 런던으로 이송됐지요. 에드워드 1세는 분노를 그대로 표출했습니다. 목을 매달고, 창자를 꺼내고, 거세하고, 몸을 네등분으로 나눴지요.

“난 잉글랜드 국민이 아니니 반역자가 될 수 없소. 난 스코틀랜드의 독립군이오”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열린 윌리엄 월리스의 재판. 19세기 화가 다니엘 맥클리스의 작품.
윌리엄 월리스가 죽기 직전 “자유”를 외쳤다는 기록은 없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잉글랜드에 굴복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죽은 장소인 런던의 ‘성 바르톨로뮤’ 병원 현판에는 게일어로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Bas Agus Buaidh(죽음과 승리)’.

윌리엄 월리스의 마지막을 묘사한 ‘브레이브 하트’의 한 장면. 역사적으로 그가 “프리덤”을 외치며 죽었다는 근거는 없다. [사진출처=IMDB]
애국지사의 죽음이 나라를 한 데로 묶다
“윌리엄 월리스의 정신을 계승하자”

에드워드 1세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장 골칫거리인 인사를 제거했으니까요. 착오였습니다. 그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스코틀랜드인들의 분노가 들끓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도 마음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월리스의 죽음이 일말의 애국심을 일깨웠던 것이지요. 로버트 더 브루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진정 윌리엄 월리스가 죽었단 말인가” 넷플릭스 영화 ‘아웃로킹’은 로버트 1세의 투쟁을 그린 드라마다. [사진출처=넷플릭스]
그는 윌리엄 월리스의 계승자임을 자처합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전사로 죽을지언정, 에드워드의 개로 살지 않겠다”고요.윌리엄 월리스처럼요.

스코틀랜드가 다시 총봉기를 시작했을 때, 에드워드 1세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1307년 7월 원정길에 병을 얻으면서였습니다. 이제 잉글랜드 총책임자는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불안을 느꼈습니다.

에드워드 1세가 아들 에드워드 2세에게 작위를 내리는 모습.
에드워드 2세는 장신의 잘생긴 미남이었으나, 화려한 건 그의 겉모습뿐이었습니다. 암군에 가까울 정도로 유약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군 아버지에, 암군인 아들. 호부견자(호랑이 아버지, 개 아들)가 따로 없었지요.

동성애인에게 국정을 맡긴 에드워드 2세
“모든 건 가배스턴과 논의하게.”

에드워드 2세의 관심사는 그의 ‘애인’에게 있었습니다.놀랍게도 그의 애인은 남성 귀족 가배스턴. 그는 모든 걸 그와 논의해 결정합니다. 두 사람은 연인에 가까웠습니다.남자인 가배스턴이 왕의 침실까지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였기 때문이지요.

“그이 침실에 또 가배스턴이 있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묘사된 에드워드 2세의 부인 이사벨라. [사진출처=IMDB]
프랑스 필립 4세의 딸인 이사벨라와 결혼했으나, 에드워드 2세는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늘 가배스턴이 있었습니다. 국정을 논하는 궁정에서나, 사적인 침실에서나 가리지 않았지요. 국익은 언제나 가배스턴의 사익보다 뒷전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신하들 왕의 총애를 살해하다
“가배스턴을 내치십시오.”

위기의 먹구름은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국고는 비어가고, 군대는 허약해져 갔습니다. 가배스턴을 내치라는 충언에도 에드워드 2세는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귀족들이 실력행사에 나섭니다. 가배스턴을 납치해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에드워드 2세는 분노에 찼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족들의 칼날이 가배스턴을 넘어 자신에게 향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 군주의 수준이 그 정도였습니다.

가배스턴을 죽인 잉글랜드 귀족을 묘사한 그림.
스코틀랜드는 단결하고 있었습니다. 로버트 더 브루스가 ‘로버트 1세’로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가 독립국임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다시 전운이 고조됩니다. 두 나라가 모든 것을 건 전쟁이 시작됩니다. ‘배녹번’ 전투였습니다.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군사보다 세 배나 많았습니다. 잉글랜드는 그만큼 이 전투에 모든 걸 걸었지요.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윌리엄 월리스가 죽음으로써 보여 준 결기를 잊지 않고 있었지요. 잉글랜드 군은 나약해질대로 나약해져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2세 치하에서의 국기문란이 원인이었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윌리엄 월리스를 위해서라도” 로버트 1세를 그린 영화 ‘아웃로킹’. [사진출처=넷플릭스]
전쟁은 때론 숫자보다 결기가 중요합니다. 스코틀랜드의 대승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국운은 저물고, 스코틀랜드는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베녹번 전투를 꼽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국가(國歌) ‘스코틀랜드의 꽃’을 통해 이날의 영광을 노래하지요.

베녹번 전투 기념장소에 마련된 로버트 더 부르스 동상. [사진출처=Martin Kraft]
대패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린 에드워드 2세
“전하에게 보고할 것은 반드시 나를 거치도록 하게.”

에드워드 2세가 진정한 혼군인 것은 대패 이후에도 나아진 점이 없어서입니다. 총애하는 귀족 휴 디스펜서에게 전권을 맡겼습니다. 에드워드 2세의 ‘문고리 권력’이 부활한 것이지요. 임금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휴 디스펜서를 통해야만 했습니다. 신하들은 ‘제 2의 가배스턴이 나타났다’고 수군댔지요.

휴 디스펜서는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기반으로 사익을 추구한 전형적인 ‘간신배’였다.
국정농단이 한 임금의 치세에 두 번이나 일어난 셈이었습니다. 휴 디스펜서는 전횡을 일삼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귀족들의 재산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았지요. 여왕 이사벨라와 왕세자 에드워드 3세의 사유재산도 포함됐습니다. 물론 이 모든 건 에드워드 2세의 보호 아래 진행된 일이었지요.

“에드워드 2세의 폭정을 더 이상 못참겠다” 아들 에드워드 3세, 애인 로저 모티머와 쿠데타를 일으킨 이사벨라.
여왕 이사벨라는 복수를 도모합니다. 내연남 로저 모티머와 음모를 꾸몄지요.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사벨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동성애에 빠진 남편에게 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약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목표는 에드워드 2세의 폐위와 휴 디스펜서의 처형. 소식이 알려지자 잉글랜드 전역에서 귀족들이 뜻을 함께합니다. 1326년 에드워드 2세는 결국 아들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위합니다.

이사벨라는 휴 디스펜서의 옷을 벗기고 창자를 꺼낸 뒤 공개적으로 거세해버립니다. 반역과 남색 혐의였습니다. 국정농단을 한 자의 최후였지요.

거세당하는 등 극형에 처해진 휴 디스펜서를 묘사한 그림. 1470년대 작품.
스코틀랜드의 역공...그리고 로버트 1세의 죽음
스코틀랜드는 웃고 있었습니다. 로버트 1세는 기회를 틈타 잉글랜드를 침공합니다.이제 막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3세에게 남은 선택지는 ‘화친’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는 마침내 휴전에 뜻을 같이합니다.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이었습니다.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고, 에드워드 3세의 누이를 로버트 1세 아들 데이비드에게 시집보낸다는 내용.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1328년 5월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완전한 독립국이라네” 로버트 1세의 책읽는 모습을 묘사한 19세기 그림.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룬 영웅 로버트. 운명의 장난인지, 독립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던 해 로버트의 건강이 악화합니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자신과 일생을 전장에서 함께 싸워온 제임스 더글라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내 심장을 꺼내 십자군 전쟁 원정에 함께 데려가 달라.”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허락한 신을 위해서 죽어서까지 ‘성전’에 함께하겠다는 의지였지요. 죽어서도 그는 전사가 되고 싶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전장에서는 언제나 장군이 앞장서야 하네” 베녹번 전투에서 잉글랜드 장수 헨리 드 보헌과 직접 자웅을 겨루는 로버트 더 브루스. 후대인 1876년 묘사도.
제임스 더글라스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스페인이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그라나다 왕국과 전쟁을 벌일 때, 제임스 더글라스가 참전합니다.

그의 목에는 큐브 모양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지요. 로버트 1세의 심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가장 위대한 전사, 로버트의 용감한 심장이 여기에 있다.”로버트 1세가 ‘브레이브 하트(용감한 심장)’으로 불린 배경입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도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이지요. 제임스 더글라스 가문은 이때부터 가문의 문장으로 ‘심장’을 새겼습니다.

더글라스 가문의 문장에 심장은 로버트 1세의 ‘브레이브 하트’를 의미한다. [사진출처= Ipankonin]
이 시대의 ‘브레이브 하트’는 어디에
윌리엄 월리스와 로버트 더 브루스. 두 영웅이 없었다면 스코틀랜드의 ‘첫 독립’은 없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 2세와 그 애인들의 두 번에 걸친 ‘국정농단’도 스코틀랜드 독립의 기틀을 닦았지요. 어떤 리더가 국정을 운영하는지가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던 셈입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브레이브 하트(용감한 마음)’가 흥망을 결정짓는 열쇠라는 것.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진리입니다.

대영제국의 일원이 된 현재도 스코틀랜드는 베녹번 전투의 장소를 기억한다. [사진출처]Martin Kraft]
<네줄 요약>

ㅇ1300년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무력 통합에 ’거의‘ 성공했다.

ㅇ하지만 대를 이은 아들 에드워드 2세는 동성애에 빠져 애인에게 모든 국정을 맡겼다. 스코틀랜드는 이를 틈타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ㅇ내전에 빠진 잉글랜드는 결국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을 허용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배경이다.

ㅇ‘브레이브 하트’를 가진 국가 책임자가 중요하다. 700년전 영국이나, 현재 대한민국이나 마찬가지다.

<참고 문헌>

ㅇ찰스 디킨스, 영국사 산책, 옥당북스, 2023년.

ㅇ윌터 스콧, 스코틀랜드 역사이야기, 현대지성사, 2005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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