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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대로 회귀한 중국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대로 회귀한 중국 

덩샤오핑의 '주석-총리' 권력분점과 당정분리 원칙 깨져
리창 총리, 시진핑 주석에 철저히 종속돼


3월5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열렸다. 중국의 입법부 격인 전인대 개회식은 보통 행정부 격인 국무원 총리의 '정부공작보고'로 시작한다. 총리는 정부공작보고를 통해 전년도 중국 정부가 거둔 성과를 소개하고 새해 정책과 목표를 대륙 전역에서 운집한 인민 대표들에게 보고한다. 따라서 정부공작보고는 전인대 폐회식 때 개최되는 총리의 기자회견과 함께 14억 중국인의 눈과 귀가 오직 총리에게 쏠리는 중요한 정치 이벤트다. 이를 보여주듯 3월5일 리창 총리는 51분 동안 정부공작보고를 읽어 내려갔다.

올해 정부공작보고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경제성장률 목표치와 국방비 증액 규모, 경제 활성화 방안 등이었다. 리 총리는 "올해 발전의 주요 목표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5% 안팎"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와 같은 수치다. 중국은 2022년 12월 '제로 코로나' 정책을 버리고 2023년 들어 '위드 코로나'로 전환했다. 중국의 리오프닝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많은 국가가 기대했으나, 그 영향은 미미했다. 하지만 중국은 5.2% 경제성장률을 달성해 당초 목표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이는 중국인들조차 체감하지 못하는 결과다.

3월4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인대 개막식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리창 총리 ⓒREUTERS연합


리창 총리 "당 중앙(시진핑)에게 충성"

올해 국방비는 전년 대비 7.2% 증액한 1조6700억 위안(약 305조원)으로 설정했다. 증가율은 지난해와 같지만 2021년 6.8%, 2022년 7.1%보다 높은 3년 연속 7%대 증가세에다 금액이 처음으로 300조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기대했던 경제 활성화 방안은 없었다. 또한 리 총리는 국내외 시장에서 지적하는 부동산 시장 둔화와 지방정부 부채난에 대해선 과거 당국이 언급했던 내용을 반복했다. 정작 리 총리가 정부공작보고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단어와 표현은 따로 있었다. '당 중앙'과 "당 중앙의 결정과 안배를 잘 관철한다"였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당 중앙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중앙정치국)을 가리켜왔다. 중앙정치국은 1921년 창당 이래 단 한 번도 변화가 없는 중국공산당의 최고 리더그룹이다. 실제로 중국공산당 창당의 아버지 천두슈, 사회주의 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개혁개방의 총설계자 덩샤오핑, 제3세대와 제4세대의 최고지도자 장쩌민과 후진타오 등은 모두 중앙정치국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최고 정점에 섰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이 이너서클에 진입하기가 더 어려운 이유는 수치를 통해 알 수 있다.

2022년 말 중국 인구는 14억1175만 명이고, 그중 공산당원은 9804만 명이었다. 공산당원 중에서 공산당 각 부서장과 중앙정부 각 부처장, 전국 지방정부 수장은 대부분 중앙위원회에 소속되는데, 현재 205명이다. 이 중앙위원회도 따로 후보위원 171명을 두어 단계를 나누고 있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과 위원을 거쳐 선출된 이가 중앙정치국원이며 현재 24명이다. 여기서 다시 낙점된 이가 6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서열 1위부터 6위까지의 권력자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최고 정점인 서열 1위는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국 국가주석이다.

그런데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제외하면 나름 상무위원 간 업무 분담이 명확했다. 1인자(주석)는 당과 군을, 2인자(총리)는 국무원(정부)을, 3인자(상무위원장)는 전인대를 맡는 식이다. 그렇기에 마오쩌둥은 국가원수 격인 국가주석자리를 진즉에 2인자에게 물려주었으나, 당권과 군권은 줄곧 쥐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예외가 덩샤오핑으로, 오직 군권만 쥐고 중국을 통치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1인 통치의 극심한 폐해를 겪으면서 중국공산당 내에 권력분점과 당정분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1982년 개헌한 현행의 중국 헌법이었다.

이 '82 헌법'에는 덩샤오핑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는데, 개인숭배 금지와 당정분리 원칙을 담았다. 그에 발맞추어 같은 해 국무원조직법도 제정했다. 국무원조직법 제2조에는 "국무원은 총리 책임제를 실시한다. 총리는 국무원의 업무를 영도한다"고 못 박았다. 뿐만 아니라 법 전문에는 중국공산당이나 당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이렇게 총리의 역할과 권한을 명확히 한 것은 중국의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 덕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중앙정치국 전원, 시진핑 심복들로 채워져

저우언라이는 건국 이래 마오쩌둥과 정치적 역정을 함께해 왔던 최고지도자다. 둘 다 사망한 해도 1976년으로 같다. 비록 저우언라이가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등으로 대변되는 마오쩌둥의 폭주를 막지 못했지만, 2인자로서 중국이 파멸에 이르는 상황은 피하도록 했다. 특히 죽기 전에 숙청됐던 덩샤오핑을 권부로 복귀시키는 데 일조하면서 포스트 마오 시대를 대비했다. 그 덕분에 마오쩌둥 사후에 4인방이 척결되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었다. 이런 역사적 교훈에 따라 덩샤오핑은 헌법을 개정하고 국무원조직법을 제정해 권력분점과 당정분리를 시스템화했다. 국가주석을 명실공히 국가원수로 격상시킨 것도 덩샤오핑의 뜻이었다.

서열 1위가 당과 군을 장악해 국가를 통치해 왔던 사회주의 국가의 틀을, 서구와 같은 책임정치 체제로 바꾸어 개혁개방을 가속화하려 했다. 따라서 1993년 양상쿤에게서 국가주석직을 이어받은 장쩌민이 친정(親政)을 시작했고, 2인자인 총리도 그에 발맞추어 임기를 함께했다. 그래서 장쩌민은 리펑 및 주룽지와, 후진타오는 원자바오와 함께 중국을 10년씩 통치했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국가주석과 총리는 일정한 수평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을 이끌었다. 덩샤오핑은 2인자의 정치적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자리도 만들었다.

바로 정부공작보고와 전인대 폐막식 직후의 내외신 기자회견이다. 1993년부터 시작됐던 기자회견은 총리가 비전과 철학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각본 없이 진행되었기에 총리의 소신 발언이 나오곤 했다. 그런데 3월4일 중국 당국은 "올해부터 총리 기자회견을 더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을 없앤 것은 누가 봐도 총리의 위상을 낮추는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전인대 기간 중 국무원조직법을 개정해 당정분리 원칙을 무너뜨렸다. 제3조에 "국무원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견지한다"며 "당 중앙의 결정을 단호히 관철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문제는 지금의 당 중앙이 1인 통치체제를 갖춘 시진핑 주석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상무위원뿐만 아니라 중앙정치국원 전원이 시 주석의 심복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리창 총리가 그 대표적 인물로 시 주석에게 철저히 종속되었다. 따라서 이번 정부공작보고는 리 총리의 시 주석을 향한 충성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해외에 거주하는 한 반체제 중국인 지식인은 X(트위터)에 "이번 전인대를 통해 덩샤오핑이 남겼던 정치적 유산이 완전히 사라졌고, 중국의 통치 시스템이 마오쩌둥이 혼자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문화대혁명 시대로 회귀했다"고 한탄했다.

칭찬하다(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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