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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에 이 식물을 넣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맥주에 이 식물을 넣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의 맥주실록] 맥주 약방의 감초, 홉

맥주는 다양한 재료들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술입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문화를 타고 이어오고 있습니다. 수천 가지 맥주도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맥주 재료가 양조사를 만나 맥주로 바뀌는 과정을 풀어봅니다. <기자말>

 홉 향을 평가 중이다.
ⓒ 윤한샘

맥주가 인간의 삶에 가까워지며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쓴맛이 도는 허브는 맥아의 단맛과 균형을 맞췄고 날카로운 향을 가진 향신료는 단순한 풍미에 복합성을 더했다. 로즈메리, 히더, 엘더 플라워, 톱풀 같은 식물뿐만 아니라 소 쓸개즙도 양념으로 첨가됐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장 기대했던 건, 보존성을 늘리기 위한 약간의 항균성이었다. 

맥주에 첨가되는 허브혼합물은 그루트(gruit)로 불렸다. 중세시대부터 중요한 재료로 자리 잡은 그루트는 주세 역할도 담당했다. 양조를 원하는 사람은 영주와 성직자로부터 그루트를 구매해야 했다.

때때로 첨가물은 부작용을 불렀다. 독초나 환각 식물은 범죄에 악용됐고 시체의 일부분도 주술적 의미로 사용됐다. 1516년 바이에른 공국에서 제정된 '맥주순수령'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부도덕한 맥주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보리, 물, 홉만 맥주 재료로 허락한다는 일종의 '식품품질관리법'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돋보인 재료는 홉(hop)이었다. 홉이 그루트의 대체 식물로 공식적으로 등장하며 오랜 시간 권력 뒤에서 혹세무민 했던 그루트는 마침내 권좌에서 물러났다. 

홉, 맥주 향미를 혁신하다
 
 홉송이
ⓒ 윤한샘

 
홉을 맥주에 처음 사용한 곳은 수도원이었다. 1050년 바이에른 벨텐부르크 수도원에서 홉을 넣었다는 흔적이 남아있다. 어떤 계기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약 100년 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쓴 약학서 <피직스>에 홉의 효능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녀는 홉이 사람의 기운을 떨어트리기 때문에 식용보다 식품 보존에 더 적합하다고 이야기했다.

홉을 맥주에 넣은 애초의 목적도 사실 항균용이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맥주를 시지 않게 보관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수도사들은 힐데가르트의 조언에 따라 홉을 넣었고,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홉의 진면목을 발견했을 것이다. 기분을 우울하게 할 수 있다는 힐데가르트의 경고는 알코올로 충분히 희석됐다. 

홉이 들어간 맥주는 모든 면에서 그루트 맥주를 완벽히 압도했다. 선명한 쓴맛은 맥아의 단맛과 멋진 균형을 이뤘고, 허브, 향신료, 삼나무, 꽃 향은 맥주를 차원이 다른 음료로 탈바꿈시켰다. 

보존성 또한 더 뛰어났다. 18세기 영국 양조사들은 식민지 수출용 맥주에 홉을 첨가해 보존 기한을 늘렸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맥주 깊숙이 스며든 홉 향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이 방법은 드라이 호핑(dry hoppi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식물 세계의 작은 늑대, 후물루스 루풀루스
 
  울산 트레비어 브루어리 홉농장
ⓒ 윤한샘

 
삼과 식물 홉의 학명은 후물루스 루풀루스(Humulus Lupulus)다. 라틴어로 작은 늑대라는 뜻의 루풀루스는 자연에서 홉이 버드나무를 죽이는 현상에서 비롯됐다. 넝쿨 식물로 하늘로 10m까지 자라며 뿌리는 땅속 2m까지 뻗는다. 유럽을 비롯해 미국,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은 물론 한국, 중국, 일본까지 북위 36도에 속하는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은행나무처럼 수나무와 암나무가 있으며 맥주에 사용되는 홉 송이는 암나무에 달린다. 수정이 되면 홉 송이가 사라지기 때문에 수나무는 철저하게 배제된다. 상업적으로 재배되는 홉은 모종을 이용하지만 취미로 키우고 싶다면 뿌리를 잘라 심으면 된다. 잎이 돋고 줄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상업 맥주용 홉은 3~5년 정도 토양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라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8월 중순쯤 넝쿨에 튼실한 홉 송이가 열리면 수확이 시작된다. 수확한 홉은 산화와 함께 갈변이 되기 때문에 넝쿨 채 자른 뒤, 즉시 줄기와 열매를 분리하는 장비로 옮겨야 한다. 

갓 수확한 홉을 바로 맥주에 넣을 수 있지만 장기 보관이 쉽지 않다. 생 홉은 보관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홉 펠렛(hop pellet)으로 가공된다. 이때 펠렛 가공 기술이 상품으로서 홉의 품질을 좌우한다. 홉을 분쇄하면 열에 의해 품질이 급격하게 저하되기에 급속 냉각 기술이 필수다. 홉 펠렛은 부피가 작고 보관이 용이해 전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홉 농사가 드문 우리나라에서 맥주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홉 펠렛. 양조에는 이 펠렛이 들어간다
ⓒ 윤한샘

 
작지만 위대한 향미 마법사

홉 송이는 여러 겹의 얇은 잎이 겹겹이 감싼 형태를 띠고 있다. 핵심은 가운데 있는 노랗고 끈적이는 물질, 루풀린(lupulin)이다. 이속에 숨어있는 홉 수지(hop resin)와 홉 오일(hop oil)이 맥주를 수백 개의 향미를 부리는 램프 속 지니로 만든다.  

홉 수지는 맥주의 쓴맛을 담당한다. 맥주에서 느껴지는 쓴맛의 99%가 여기서 나온다. 비밀은 홉 수지에 들어있는 알파산(α-acid)이다. 알파산 자체도 약간의 쓴맛을 갖고 있지만, 맥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헐크 같은 존재로 변해야 한다.  

알파산을 헐크로 만드는 기폭제는 뜨거운 온도다. 100℃ 이상 끓는 맥즙 속에서 알파산은 이소 알파산(iso α-acid)으로 전환한다. 이소 알파산은 알파산보다 3배 이상 쓴맛을 맥주에 퍼뜨린다. 품종에 따라 홉은 4~15%의 알파산을 품고 있다. 그중 브라보, 매그넘, 워리어, 토마호크처럼 10% 이상의 알파산을 가진 홉을 비터링 홉(bittering hop)이라 하며, 주로 쓴맛을 내는 용도로 사용한다.    

양조사는 자신이 디자인한 맥주 레시피에 따라 쓴맛을 조절한다. 강한 쓴맛을 내고 싶다면 홉을 많이 넣거나 끓임 시간을 늘리면 된다. 보통 45~90분 동안 끓임을 진행하며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면 길어도 90분을 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맥주 색이 짙거나 알코올 도수가 높으면 쓴맛이 강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색과 알코올은 쓴맛과 관련이 없다. 

홉 수지가 쓴맛 마법사라면, 루풀린에 장착된 또 다른 무기, 홉 오일은 향기 마법사다. 양은 미미하지만 쏟아내는 향은 후각을 뒤덮을 정도다. 아직 밝혀내지 못한 향기 물질도 수두룩하다. 리모넨, 제라니올, 리나로올, 피넨, 카리오필렌 등 수백 종의 향 분자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우리에게 익숙한 향을 맥주에 녹여낸다. 

제라늄, 장미, 제비꽃 같은 꽃 향과 잔디, 젖은 흙, 소나무를 비롯해 레몬, 파인애플, 오렌지, 자몽 같은 열대과일, 딸기, 라즈베리, 구스베리 같은 베리류 그리고 로즈메리, 타임, 세이지 같은 허브까지 수백 종의 향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알파산은 낮지만 홉 오일이 풍부한 홉은 아로마 홉(aroma hop)으로 분류한다. 영국의 퍼글, 이스트 켄트 골딩스, 챌린져, 체코가 자랑하는 사츠, 독일 출신 할러타우와 슈팔츠는 유럽을 대표하는 아로마 홉으로, 노블 홉(noble hop)이라는 근사한 별명을 갖고 있다. 구세계 홉이라 불리는 이 홉들은 꽃, 허브, 젖은 흙, 풀 향을 영국 에일과 독일, 체코 라거에 풀어낸다. 

미국 홉은 떠오르는 신성이다. 20세기 후반 크래프트 맥주 성장과 함께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홉의 특징은 풍성한 열대과일과 베리 향이다. 캐스케이드, 모자이크, 시트라, 갤럭시 같은 홉들은 자몽, 파인애플, 망고, 소나무, 라즈베리 향을 가득 안고 있다. 신세계 홉으로 구분되며 최근 몸값이 수직상승하고 있다. 

훌륭한 연주자가 있더라도 지휘자가 없으면 무용지물, 수백 종의 홉이 선사하는 수천 개의 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농도를 조절하는 몫은 결국 양조사에 있다. 양조사는 맥주 스타일에 맞는 향에 적합한 홉을 선별하고 언제 어떻게 투입할지(hopping) 결정해야 한다. 

수지와 달리 오일은 열에 취약하고 물에 녹지 않는다. 그래서 향을 위한 홉은 일반적으로 끓임 과정 후에 투입한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끓임이 마무리되기 15~20분 전 그리고 막 끝난 후 홉을 넣어 쓴맛과 향 모두 일정 부분 기여하는 것이다. 

더 강한 향을 내고 싶으면 이후에 홉을 추가한다. 맥즙 온도가 어느 정도 내려간 뒤 발효 전 홉을 투입하는 것을 레이트 호핑(late hopping) 또는 홉 스탠드(hop stand)라고 한다. 발효가 끝난 후에 홉을 넣는 드라이 호핑(dry hopping)도 있다. 이 방법은 홉 오일 속 향 분자를 맥주 속에 공존시켜 즉각적이고 풍성한 향을 약속한다.  

현대 맥주의 주인공, 홉
 
 홉을 건조시킨 것
ⓒ 윤한샘

 
최근 크래프트 맥주는 양조를 더 혁신적이고 도전적으로 바꾸고 있다. 발효 도중 홉을 투입하는 홉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은 크래프트 맥주의 산물이다. 왕성한 발효 중에 홉을 넣으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뉴잉글랜드 IPA(인디아 페일 에일)라고 불리는 스타일에서 느껴지는 오렌지, 망고 주스 같은 향은 홉 트랜스포메이션에서 발현되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최종 맥주 향은 홉을 투입하는 단계와 양 그리고 얼마나 서로 다른 홉을 넣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동일한 홉도 발효 전에 넣느냐, 후에 넣느냐에 따라 향의 강도와 스펙트럼이 달라진다. 서로 다른 홉을 한 번에 넣는지, 순차적으로 넣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1가지 홉으로 쓴맛부터 향을 내는지, 10가지 이상의 홉을 차등적으로 넣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홉의 양에 따라 향의 농도가 달라지는 건, 기본적인 원리다. 

심지어는 같은 홉이라도 효모의 종류에 따라 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효모와 홉에 따라 미묘한 상관관계와 궁합도 존재한다. 효모와 홉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법은 아직 인간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경험 속에 쌓이는 지식과 공유로 결과를 예측할 뿐이다. 결국 정답은 없다. 최종 맥주의 향미가 세간의 인정을 받으면 그게 답이다. 하지만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양조사는 자신의 경험을 숫자로 기록하고 레시피를 디자인한다. 그래서 맥주는 다른 어떤 술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홉은 맥주 생태계에서는 후발 주자지만 현대 맥주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맥주가 보여줄 수 있는 수만 가지 향미는 홉 덕분에 가능하다. 라거 권력에 금을 내고 있는 크래프트 맥주 바탕에도 홉이 있다. 홉이 없다면 맥주 세계는 단순하고 공허할 것이다. 홉과 그 비밀을 풀고 있는 인간, 맥주 세계는 여전히 확장 중이다. 기대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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