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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러시아판 이괄의 난, '측근 탓' 못하는 배신의 정치

[논&설] 러시아판 이괄의 난, '측근 탓' 못하는 배신의 정치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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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재현 논설위원 =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조선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괄(1587~1624)과 여러모로 닮았다. '푸틴의 충견'이라는 프리고진처럼 이괄은 인조에겐 둘도 없는 심복이었다. 이괄은 어릴 적부터 숱한 비행을 저지른 사고뭉치였지만, 인조의 신뢰를 등에 업고 .부원수에까지 올랐다. 인조는 등극 후 변방 후금(청나라)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이괄에게 북방 수비를 맡기며 1만2천의 정예 병력을 내줬다. 왕의 칼인 어검을 내리며 수레를 밀어주는 인조에게 이괄은 "소신, 죽기로 싸워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지만, 권력 실세인 이귀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리자 아군을 이끌고 수도 한양으로 진격했다. 인조가 이괄의 아들 이전이 역모를 꾀했다는 이귀의 고변에 마음이 흔들려 이전을 압송하라 명하자 2차 반정을 도모한 것이었다.

이괄의 주력부대는 당시 조선의 용병과 다름없던 항왜(降倭)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에 귀순한 그들은 일본 전국시대의 내전 속에 단련돼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칼솜씨에 총포술도 갖춰 후금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무라이 출신 서아지 등 항왜를 선봉에 세운 이괄은 파죽지세로 관군을 돌파하며 한양을 점령했으나 이내 자만하다 수세에 몰렸고,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나 잠을 자던 중 배신한 측근들에게 목이 잘렸다. 이괄의 반란은 평정됐지만, 할아버지 선조처럼 도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인조의 리더십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이후 인조는 '친명배금' 외교를 추구한 공신들의 기세에 눌려 우왕좌왕하다 병자호란을 맞았고, 나중엔 의심병에 걸려 아들인 소현세자를 시기하고 며느리까지 죽였다.

박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주범 김재규
박대통령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주범 김재규

박정희 대통령 저격 . 시해사건 현장검증에서 주범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저작권자 ⓒ 2001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괄처럼 측근이 주군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모반을 꾀한 사례는 우리 현대사에도 더러 등장한다. 10·26사태가 대표적이다. 김재규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고향(경북 구미) 형님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뒷배로 승승장구했다. 초대 보안사령관과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을 거쳐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중앙정보부장에 올랐지만, 부마사태 와중에 박 대통령이 경호실장 차지철을 두둔하자 대통령 시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동, 서양 가릴 것 없이 역사의 변곡점에는 항상 배신이 자리했다. 친아들처럼 아낀 브루투스의 칼에 맞은 고대 로마의 독재자 카이사르의 죽음과 로마 제국의 시작, 우왕과 최영 장군의 명을 받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찬탈한 이성계의 조선 개국 과정도 배신이란 단어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군신 관계가 원수지간이 된 것을 두고 역사서에선 왕보다 신하의 잘못을 부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신하가 왕을 거스르면 반역으로, 왕이 신하를 내치면 깨끗이 청소한다는 뜻의 숙청으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절대권력에 취해 평정심을 잃은 왕이 모반을 자초한 측면이 강한 게 사실이다.

'바그너 그룹 무장 반란' 대국민 연설하는 푸틴
'바그너 그룹 무장 반란' 대국민 연설하는 푸틴

(모스크바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반란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연설하고 있다. 2023.06.26 ddy04002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심복 프리고진의 배신으로 집권 23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벨라루스의 중재로 프리고진이 반란군을 뒤로 물리고 러시아를 떠나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됐지만,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 위협을 받은 데 대한 책임과 후과는 푸틴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 됐다. 푸틴이 앞으로 어떻게 돌파구를 모색할 것이냐도 프리고진의 운명 못지않게 관심을 끈다. 말년 후궁과 무속에 휘둘린 인조처럼 '찌질이 군주'의 길을 걷다 권력 전면에서 사라지거나, 궁예와 광해군처럼 권력 유지에 눈멀어 무자비한 숙청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두 가지 모두 푸틴의 리더십 위기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어느 쪽이 됐든 러시아 국민과 그 주변국들은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게 됐다. 러시아에서 벌어진 '배신의 정치' 내막을 꿰뚫어 보면서 어디로 튈지 모를 '푸틴 리스크'에 대비할 때다. j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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