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스파클뉴스골드스파클뉴스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은밀한 차별 스며든 은밀한 공간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은밀한 차별 스며든 은밀한 공간

남녀 함께 일하는 회사도
男화장실이 훨씬 많아
젠더·인종 따른 불평등
화장실 문화에 고스란히
최고 지성 모인 NASA도
한때 '흑인 화장실' 운영


화장실 전쟁
알렉산더 K 데이비스 지음
조고은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2만1000원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서구화된 공중화장실에 익숙하다. 대부분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이 나뉘어 있고 각각 한 층의 양 끝이나 별개의 복도 또는 아예 다른 층에 배치돼 있는 경우가 많다. 양변기들은 서로 분리된 칸으로 나뉘어 걸어 잠그도록 돼 있고, 한편에 장애인이나 유아를 위한 전용 칸이 마련돼 있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저 각자의 편의를 위한 형태 같다. 하지만 이게 정말 최선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이런 '경계 짓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걸까.

'화장실 전쟁'은 공중화장실에 반영된 21세기의 이데올로기와 제도, 불평등을 파헤친 책이다. 젠더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을 연구해온 알렉산더 K 데이비스 미국 프린스턴대 사회학과 교수의 첫 저서다. 저자는 미국 공중화장실의 200년 변천사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해 오늘날을 지배하고 있는 성별 분리의 기원을 추적했다. 지난 25년간 미국 전역에서 '성중립 화장실'을 설계하고 확대해온 시도들도 탐구한다. 젠더화된 조직 이론을 토대로 실제 사례는 물론 관련 논문과 건축 설계 문서, 연방법원 의견서 등을 총망라했다.

저자에 따르면 공중화장실은 미국에서 인종과 성별, 장애, 사회계층 같은 집단 차이에 기반한 불평등이 오랫동안 유지·확장돼온 중요한 장소다. 미국 최초의 공중화장실은 위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진 19세기에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공중화장실은 그다지 공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압도적 다수가 호텔, 기차역, 백화점 등 개인 소유의 중산층·상류층 시설에 위치해 있었고 대중에게 개방된 극소수의 화장실은 배관이 하수도에 연결돼 있지 않거나 수백 명의 행인이 볼 수 있는 등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공중화장실은 시작부터 계급사회를 반영하고 있었던 셈이다.

공중화장실이 좀 더 보편화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회운동과 정치개혁으로 부유한 백인들뿐만 아니라 흑인 노동자 등 가장 낮은 부류의 시민들을 위한 공중화장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중화장실을 설계하는 데 성별 분리에 대한 상류층의 선호가 점차 뚜렷해진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입법자들은 화장실 규제를 통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문화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남녀가 은밀한 장소에 함께 있으면 사회적·성적 위생을 지킬 수 없고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결국 1920년대까지 미국의 거의 모든 주가 직장 화장실의 성별 분리를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성별 분리가 고착화되면서 화장실은 사회적 성차별의 축소판이 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사회활동을 하는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직장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이 훨씬 많았다. 한 건물 안에 여자 화장실이 없는 경우도 흔했다. 인종 차별도 마찬가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히든 피겨스'(2017)에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하던 주인공 캐서린 존슨이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800m 떨어진 화장실에 가기 위해 뛰는 장면이 담겼다. 실제로 1960년대 미국은 견고한 제도를 통해 화장실까지 흑백과 남녀를 구분해 사용하도록 했다.

미국에서 지금과 같은 '다양성 존중'과 '평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고개를 든 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사회적으로 포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정치에 반영되면서 급속도로 변화가 확산된 것이다. 일례로 미국 연방의회가 1990년 장애인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미국 장애인법'을 통과시키면서 화장실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구분이 점차 사라졌다.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들은 앞다퉈 성 중립 화장실과 패밀리(가족용) 화장실을 만들었다.

화장실 논쟁은 국내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일례로 2022년 성공회대와 KAIST 캠퍼스 내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모두의 화장실)'이 잇달아 설치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모두의 화장실은 남자와 여자, 장애인, 성소수자, 성별이 다른 환자와 간병인 등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다. 성별을 나타내는 표지판을 없앴고 넓은 공간 안에 여러 편의시설을 갖췄다. 하지만 '소수만을 위한 화장실'이라며 지자체에 폐쇄명령을 요청하는 민원이 접수되고 반대 시위가 열리는 등 찬반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저자는 책에서 젠더 이데올로기는 제도적으로 성취된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평등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던 노력들은 계급 질서를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고, 젠더화된 조직과 불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특권과 제약을 넘나들며 기존의 관행에 도전하기도 했다. 화장실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의 출발점은 화장실의 어떤 형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나아가 젠더를 필연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유연한 사고와 포용성은 비단 화장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송경은 기자]

칭찬하다(1)
허가 없이 전재할 수 없습니다:>골드스파클뉴스 »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은밀한 차별 스며든 은밀한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