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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불에 그을린 인왕산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논&설] 불에 그을린 인왕산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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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발생한 서울 도심의 인왕산
산불 발생한 서울 도심의 인왕산

(서울=연합뉴스) 김주성 기자 = 2일 오후 산불이 발생한 서울 종로구 인왕산에서 소방헬기가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2023.4.2 utzza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논설위원 = 서울 도심의 인왕산 정상에 오르면 '치마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의 본처 폐비 신씨의 전설이 담긴 바위다. 신씨는 연산군 처남인 신수근의 딸로, 반정 7일 만에 강제 이혼을 당하고 궁에서 쫓겨났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세력 앞에서 "조강지처를 어찌 내칠 수 있느냐"며 버텼을 정도로 부부애가 남달랐다. 신씨는 중종이 자신을 그리워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궁이 내려다보이는 인왕산 정상 바위에 과거 즐겨 입던 치마를 걸어놨다고 한다. 이 대목은 역사 기록에 없는 민담이지만, 중종 사후 치마바위에 얽힌 얘기는 인왕산을 상징하는 전설이 됐다.

인왕산은 경복궁의 '좌(左) 청룡, 右(우) 백호'에서 호랑이에 해당하는 산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궁의 방향을 정할 때 책사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다. 그러나 정작 한양 천도를 도운 무학대사의 뜻은 달랐다. 선조 때 차천로가 지은 '오산설림'에 따르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나라의 주산(主山)으로, 백악(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자고 제안했다. 인왕산이 난리를 진압한다는 진산(鎭山)의 형세를 갖췄다는 게 이유였다. 이에 정도전은 "제왕이 동쪽을 바라보는 말을 듣지 못했다"며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청와대 쪽을 바라보면 북악산 정상의 한쪽 편이 무너져 내린 듯 가팔라 험하다는 인상을 준다. 무학대사의 뜻이 받아들여졌다면 험하디험한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인왕산을 말할 때 호랑이가 꼭 따라붙는다. 호랑이 출몰이 잦았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높이 338m의 야산이지만 고종 때까지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인명을 해쳤다는 기록이 많다. 세종은 호랑이 잡는 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만들었는데 한때 500명가량이 됐고, 선조실록은 "창덕궁 안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한 두 마리가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인조실록엔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나무꾼을 잡아먹고 궁궐 후원을 넘었다"고 적혀 있다. 인왕산 호랑이에 관한 기록은 고종 5년인 1868년 "북악산 봉우리에서 3마리, 수마동(홍은동)에서 2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마지막이었다. 인왕산은 그만큼 민초들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

영조 15년인 1739년 유생 김태남은 "근년에 천재(天災)와 시변(시대의 변고)이 달마다 일어난다. (중략). 구천 아래에서 원한을 품은 후비(폐비 신씨)의 기가 하늘의 화기를 범해서 이변이 일어난 것"이라며 "비상조처"를 건의했다. 당쟁에 시달리던 영조는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역적' 폐비 신씨의 복위를 단행하고 단경왕후로 추존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국민을 하나로 묶는 대통합 조치였다.

작년엔 이태원 압사 참사가 나고 최근엔 남부지방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등 이상기온 현상이 거듭되고 있다. 지난 2일에는 인왕산에서 원인 모를 산불이 발생했는데, 한때 불길이 바람을 타고 정상 부근으로 번졌다고 한다. 국민의 민생은 어려운데 국론은 여러 개로 쪼개져 있다. 여야 지도자들이 불에 그을린 인왕산과 치마바위를 바라보면서 영조의 리더십을 고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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